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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서원충의사 묘정비를 세우다
이  름 : 가호서원
시  간 : 2019-01-06 03:07:34 | 조회수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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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佳湖書院 忠義祠 廟庭碑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참혹한 7大戰亂壬辰倭亂 朝鮮이 망하지 않은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義兵의 활동이다. 많은 義兵將 가운데 가장 혁혁한 戰功을 세운 인물이 바로 北忠毅南忠武로 일컬어지는 忠毅公 農圃 鄭文孚 선생이다.

선생은 文武兼全한 걸출한 人物로 왜적의 손에 거의 망해가는 나라를 구출한 위대한 戰功千秋에 남겼으니, 우리 후인들은 선생의 爲國忠節을 길이 欽仰하면서 역사상의 훌륭한 스승으로 삼아 배워야 하겠다.

書院은 원래 學德이 있는 先賢들을 尊崇하는 곳이다. 선생을 모신 사당 네 곳이 모두 咸鏡道에 있고, 남한지역에는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 없었다.

위대한 선생에게 대한 典禮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儒論이 세차게 일어나자, 선생의 宗孫 奎燮과 후손 九錫 등이 유림과 후손들의 역량을 규합하여 마침내 후손들이 세거하는 晋州 貴谷佳湖書院忠義祠를 창건하였다. 祠額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1997년 남강댐 숭상공사로 현재의 龍巖里로 이전 확장하였다. 이때 대종친회의 도움과 후손 한재의 역할이 컸다. 藏板閣, 유물관을 건립하였고, 2013년에는 北關大捷碑 이모비와 국역비도 세웠다.

선생의 子虛, 호는 農圃, 본관은 海州이다. 海州鄭氏高麗 侍中 諱肅을 시조로 삼는다. 朝鮮朝에 들어와 諱易大提學 左贊成을 지냈고, 領議政追贈되었고, 諡號貞度이다. 고조는 通政大夫 諱延慶, 증조는 判書 諱希儉, 조부는 參判 諱彦慤, 부친은 判書 諱愼이다. 모친은 將仕郞 金興禮의 따님이다.

156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주 聰英하여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문집에 남아 있다.

1585生員 進士, 158824세에 文科 甲科 2위로 급제하였다. 弘文館 修撰, 知製敎, 司憲府 持平 등 직을 거쳐 15917咸鏡道 兵馬評事에 임명되었다.

1592414일 왜적 20만 여명이 朝鮮을 침략하여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6월에는 倭將 加藤淸正鐵嶺을 넘어 함경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관군은 다 무너지고 고을 원들은 도망쳐 숨으니 함경도 전체가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전란의 틈을 타고 女眞族도 침략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전 鞠景仁, 鞠世弼 등은 왕자 臨海君, 順和君과 대신들을 잡아 왜적에게 바쳤다. 민심이 흉흉하였으나 누구 한 사람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7월에 倡義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몇 달 뒤 鏡城儒生 崔配天鍾城府使 鄭見龍 등 여러 사람들이 창의하고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선생은 倡義檄文을 지어 함경도 백성들에게 忠義로써 격려하니, 의 사람들이 奮起하였다.

919吉州倭賊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첫 번째 勝 捷으로, 이때부터 軍聲이 크게 떨쳤다.

28일 다시 檄文하여 天道人道를 헤아리고 忠義를 말하니 名正言順이라, 함경도 사람들이 격문을 읽고 울며 와서 호응했고, 인심도 크게 안정되었다.

會寧의 아전과 군사들이 叛賊 鞠景仁 및 그 무리들의 목을 베어왔다. 宣祖에게 狀啓를 올렸다. 곧 이어 鞠世弼의 목을 베고 또 장계를 올렸다.

선생은 호령이 엄숙하고 상벌이 분명했으므로, 감히 군법을 범하는 사람이 없었다.

10월 그믐에 吉州 長坪에서 倭賊激戰하여 적장 5명을 죽이고, 820여 명의 목을 베고, 180필을 얻었다. 왜적들이 생포해 가던 우리 백성 및 가축 무기 등을 탈환했다. 이에 원근에서 호응하여 의병이 7천 명에 이르렀다. 후세의 평하는 사람이, “임진왜란 중에 민중들을 忠義로써 격려하여 온전히 승리하고 전란을 극복한 것은 農圃에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다.”라고 했다.

1225일 선생은 길주성 주위에 복병을 설치해 놓고 臨溟으로 이동하여 수백 명을 목 베었다. 軍聲이 크게 떨쳤고, 왜적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 때 臨海君을 호종하여 왔던 尹卓然咸鏡道 監司가 되어 왔다. 선생의 관직이 兵事이면서 義兵大將이라고 일컫는 것과 세운 戰功이 자기보다 나은 것 등을 시기하여 조정에 아뢰면서, 선생을 誣陷하여 戰功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억울한 일이 벌어졌다. 윤탁연이 의병대장직을 바꾸자, 선생은 6진을 巡行하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叛黨을 베고 오랑캐를 불러 開諭하니 감히 다시 난리를 꾀하지 못하였다.

159319일 선생은 叛賊 鞠世弼의 목을 벤 공만 인정되어 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정현룡이 의병대장의 역할을 못 하자, 선생을 다시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22端川에서 수백 명의 왜적을 격파하였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탁월한 전술을 전개하였다.

21加藤淸正이 의병에 포위된 吉州의 왜적 부대를 구출하려고 스스로 2만명을 거느리고 마천령을 넘어 오자, 선생은 군사 3천명으로 그 뒤를 끊고 굳센 군사를 지휘하여 60여리를 싸우면서 白塔郊에 이르러 大破한 후 영동까지 추격하였다.

이때부터 왜적이 다시는 함경도에 들어오지 못 했다.

선생이 마침내 장평임명단천백탑교의 4大捷6진을 鎭定한 공로를 기록하되, 모든 공을 장병들에게 차등 있게 돌리고 전혀 자신의 공로로는 삼지 않았다. 崔配天行在所로 보내어 이러한 戰功을 아뢰었더니, 宣祖가 접견하고서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大捷으로 咸鏡道를 수복한 것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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