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서원

가호서원
소재지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길 59-2
창건년대 계축년(1973) 봉안위 충의공 농포 정문부
상향축문 경천욕일(擎天浴日) 위진훼복(威振𠦄服) 덕피생민(德被生民) 공존사직(功存社稷)
향례일자 양력5월 첫주 일요일 주관 유림
비고 경남도문화재 자료 제61호(1983.7.20) 충의사·가호서원 건물2동
경남도유형문화재 제567호(2015.1.15) 정문부 농포집 목판 191매
경남도유형문화재 제615호 농포문중고문서 123점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농포 정문부를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당초 함북(咸北)에 있는 네 개의 사우에 향사했다가, 1970년 충의공 후손들과 진주향교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현 위치에 사우를 건립했다. 서원 경내에는 3칸의 묘우,신문,5칸의강당,정문부선생 유물전시관이 있다. 강당은 정면3칸,측면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 옆에는 각 2칸의 방을 배치하였다.

충의공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말년에 시화에 연류되어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가솔에게 "다시는 벼슬을 하지 말고, 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라"고 유언하였다 한다.

후손들의 삶의 터전으로 진주(晋州)를 택한 것은 한때 창원부사로 있으면서 자주 진주를 찾아와 그 빼어난 자연경관과 후덕한 인심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유언에 따라 장남 정대영(鄭大榮),차남 정대륭(鄭大隆)과 동생 용강공 정문익(鄭文益)은 해를 넘긴 1625년 2월 양주 송산(지금의 의정부시)선영하에 장사를 지내고 상복을 입은 채 가족을 데리고 진주로 남하하여 오늘날 해주정씨 농포공파와 용강공파가 진주를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가호서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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